현대시

[스크랩] 오규원의 한잎의 여자(시평)

김데레사 2014. 5. 13. 22:20

 

<재미있는 시평>

 

한 잎의 女子 1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女子 2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女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女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女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女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女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女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女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女子, 더러 멍청해지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女子 3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

 

 

 

속물적인 그리고 보다 문학적이고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여자의 남자, 오규원 시인


남자에게 여자는 폭력입니다. 남자에게 여자는 감당할 수 없는 전폭적인 폭력이지요. 피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때로는 신화처럼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찾아오고 때로는 술어나 형용사가 아닌 인생에서 가장 핵심인 주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규원 시인은 <한 잎의 여자>라는 시에 부제로 언어에 대한 정의라고 하기에는 막막한 신비스러움을 풍경처럼 매달아 놓았습니다.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한 번에 부슨 의미인지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난해한 풍경을 시의 추녀에 달아놓은 셈이지요. <한 잎의 여자>는 아주 단순한 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그 나열이 시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나열이 어떻게 시가  되었나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언어가 가진 막막함의 신비성을 좋아하는 여자와 동격에 두고 있습니다. 시의 제목 밑에 단 시의 부제로 언어를 들여 여자라는 존재가 꿈을 꾸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도의 기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제목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것을 감지하게 되지요. <한 잎의>라는 말은 여자와 만날 때 조금은 어색한데 시를 읽다보면 공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물푸레나무와 연관되어진 제목이 아닌가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여자 1>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여자 2>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한 잎의 여자 3>


묘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 편의 시 모두 마지막 연마다 나무가 나옵니다. 그래서 한 잎의 여자라는 제목을 따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많은 잎새 중에 하나처럼 많은 사람 중에 특별하지 않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시인 본인만이 알고 있을 듯합니다. 잎새라는 말에서는 독립성보다는 나무에 매달린 연약한 초록빛이 떠오릅니다. 바람에 파르라니 떨다가도 정지하는 순간 빛을 손으로 곱게 받았다가 흔들릴 때마다 떨구어 버리는 맑지만 조금은 변덕스러운 소녀 같은 느낌이지요. 

<한 잎의 여자>라는 시가 독립된 세 편의 시임에도 하나로 묶은 것은 독립과 연결의 이중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시인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느낌을 단순하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상하게도 한 여자에 대한 정의가 반복되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 시는 사람을 끕니다. 남자의 건너편에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이 남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남자는 여자가 낳았거든요. 여자는 남자의 속을 알아도 남자는 여자의 속을 모르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감칠 맛 나고 매력 있습니다. 정의가 많다는 것은 정의가 정확하지 않다는 말과도 일맥을 같이 합니다. 그만큼 이 시는 정의의 순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정의내림의 순도가 떨어져서 도리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문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가진 상상력은 모호함과 중의적인 표현에서 상상력의 연기가 더 모락모락 나거든요. 그리고 이 시가 재밌으면서도 발랄한 기쁨을 선물하는 것은 시인이 가진 정신세계에서 길어 올린 독특한 속물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어디에서나 만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자입니다. 이런 속물성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저 자신도 가진 사람의 속물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람에게 속물성만한 친근감도 없거든요. 이런 미묘한 감정변화의 복잡거림 속에 갇혀 있는, 어쩌면 열려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그 <한 잎의 여자>가 시인에게는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변화에도 우주의 흔들림을 느낄 만큼 사랑하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잎의 여자>가 아파하면 시인은 더욱 가슴 시려하면서 아파하리라 보입니다. 그 <한 잎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망할 시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작은 변화의 파장에도 환희와 절망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

위에 적지 않은 또 다른 여자가 사람의 마음을 끕니다. 속물성과는 거리가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보다 문학적이고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여자지요.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다시 읽어 보세요. 묘한 자극이 파르르 떨게 합니다. 정의 내려지지 않는 언어들이 숨죽인 듯 깜짝거리는 듯합니다. 가늠하기 힘든 상상력이 날개를 달고 나비처럼 가볍게 날기도 하고, 바람에 살랑 내려앉는 물푸레나무잎새 같기도 합니다. 정의되지 않는 것처럼 상상력을 이끌어오는 것은 드뭅니다. 남자에게 가장 먼 곳에 살고 있는 존재가 여자지요. 여자에게 여자 또한 아득한 존재지요. 좀 전에 이야기 했듯이 정의되지 않는 존재가 여자거든요.

남자라는 근육은 여자라는 꿈을 못내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으로 아파하고 가지려 합니다. 가지려는 노력은 언제나 상처를 주지요. 마음에 남는 상처지요. 소유만큼 강렬한 감정도 없는데 근육질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이 여자거든요. 왜냐고요, 이야기 했지요, 여자는 정의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여자를 보셨나요.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참 아득하게 만드는 여자지요. 걱정스러우면서도 도발적인 여자인지도 모르지요. 또 다른 여자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인가 보실래요.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더 막막해지지 않나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입니다.

 


모국어의 극치로 여자를 유혹해 꿈결에 젖게 한 시인


시인은 자꾸 여자를 미궁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따라가는 남자도 문제지만 꼬리 흔들며 유혹하는 정의되지 않는 <한 잎의 여자>가 먼저 문제겠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는 누가 뭐래도 이런 여자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끝에 있지 않습니다. 남자의 반대편에 여자는 있거든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갈망하지요. 남자가, 시인이 남자이기에 가장 좋아하는 여자는 바로 이런 여자입니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여자는 남자가 가지고 싶어 하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수놈이 암놈을 사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육질의 남자가 꿈꾸는 여자를 사랑한 것도 맞습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통로를 열어놓고 몽환의 환각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여자가 참 아름답고 이쁘고 곱습니다. 또한 시가 그립고 아쉽고 아픕니다. 아련하게 파고드는가 하면 보듬고 싶어지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합니다. 시인은 떠나갔지만 모국어로 이러한 꿈결에 젖게 한 시인이 더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오규원 시인을 이십대 때 열렬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물푸레나무를 알려고 물푸레나무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 시는 생기발랄하고 재기발랄합니다. 그러면서도 묘한 감칠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칠맛이란 음식을 먹은 뒤에까지도 혀에 감기듯이 남는 맛깔스러운 뒷맛이라고 사전에는 정의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휘감기어 여운을 남기는, 사물에 담긴 묘미라고도 정의하고 있습니다. 헌데 <한 잎의 여자>가 그러한 뒷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가 시인을 환상 속에 놓이게 하는 힘을 가진 시입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시인은 풀 같은 존재지요. 푸른 것 말고는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풀에게서 무엇을 바라기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약하고 모자란 듯합니다. 그러함에도 때로는 사람이라는 이름에서 나는 거친 느낌이 시인이라는 사람에게 다가가면 이내 순화되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적어도 순수함은 시인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오규원 시인은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시인은 자연화하고 싶었나봅니다. 오규원 시인이 떠나면서 제자의 손바닥에 글을 하나 적어주었다고 합니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66세로 별세한 오규원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시의 끝 구절처럼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습니다. 20여 년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시인은 중환자실로 옮겨지기 전에 제자 시인인 이 원 씨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한적한 오후다’로 시작되는 4행의 짧은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시인은 생전에 자신이 저세상으로 가면 화장해서 뿌려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인의 뜻을 기려 수목장으로 치렀습니다. 한 시인은 그렇게 머물다 갔습니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하면서 갔습니다. 한적한 오후이면서, 불타는 오후인 이중성의 세상을 하직하고 나무 속에서 긴 잠을 자러 갔습니다.  

장례식에서는 <혼자 걸어서 갔다 왔다> 시작되는  '그림자와 길'을 참석한 사람 모두 함께 읽었다고 합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했습니다. 시인은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습니다.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러 문인들을 길러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소설가 신경숙, 시인 양선희 함민복 장석남 박형준 씨가 있습니다.

시를 쓰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 이상 변할 것도 없나봅니다. 시에 젖어 살다보니 다른 것에는 젖지 않아, 그 여린 시를 가지고 병상에서 떠나는 순간까지 시에 젖어 살았나봅니다. 이 시가 말하고 싶은 내용도 그러한가봅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는 말이 경구처럼 들립니다. 시에 미리 젖어 다른 것에 젖지 않고 살다간 시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끝


- 글, 신광철

1957년 진천에서 태어났다. 문학세계 신인상과 불교문예 삼오문학상을 수상했다.

세계 PEN 클럽 한국지부와 문인협회 회원이며, <불교문예>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오규원·시인, 1941-2007)

현대시작법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죠. 오규원시인은 광고에 대해서도 관심(혐오)이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이는 그분의 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인 비평일줄은 모르나 오규원시인의 시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의 후기작으로 와서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1.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이 작품은 제목에서 그 내용의 풀이를 암시하 0.고 있는데 이 시는 우화형태로 되어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의인화해서 화자로 하고 있는 만큼 작품 전편에 걸려 있는 중얼거림의 말이나 행동은 죽음 그 자체 -또는 나의 삶 자체- 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은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작가의 인식이 드러나 있습니다.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바꾸면서도 금방 "나는 할 일이 많아"라고 변명을 찾아내어, 걷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안일한 그 정신을 적당히 합리화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일을 하다가 우선 한잔 하기로" 하고는 "한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보기로 미루는 그런 존재이며, 일이야 어떻게 되었든 주말 여행이라도 가야겠다고 먼저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며, 그런 사고를 "건강이 제일이지-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합리화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로서의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일을 미루기를 좋아하고, 변명을 좋아하고, 합리화를 좋아하는 일상 속의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화자를 '나', 또는 '우리' '그' 로 하지 않고 구태여 '죽음'으로 한 것은 그런 일상속의 우리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것과 다르지 않다는 해석을 우화의 형식을 빌어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로 인해 삶의 영위자체가 곧 죽음과 같다는 해석적 우화가 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화자로 하였을 경우 시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의인화된 사물에 감정이입을 하여 인간처럼 감정적 파장을 함께 드러내는 형태이고, 또 하나는 감정을 배제하여 극단적인 사실적 수법으로 묘사하는 형태입니다 이 시의 경우는 전자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시는 무료하고 게으른 삶이란 죽음과도 같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대로 일한 자만이 놀 때 진정한 즐거움을 알 수 있겠지요. 매일 무료하고 늘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휴식도 일상이 되어 놀이도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제기 됩니다. 그럼 바쁘게 살아가는 삶은 진정한 생(生)이고 광명이란 말입니까? 일에 찌든 일상역시도 죽음입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죽음과도 같고, 죽음이 희망인지, 삶이 희망인지 구분을 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을까요? 여기에서 시인은 독자의 관점을 심히 제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무료하게 살지 맙시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거니까" 라는 말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을 나쁜 것으로 매도하고 있으며 바쁜 삶을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성찰이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인간의 삶은 아름답기도 추악하기도 합니다. 죽음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삶이라는 것은 짧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그러기에 최선을 다하자는 시인의 주관은 가슴에 와 닿지만 무료한 삶을 죽음으로 매도하는 계몽적 표현방식은 그리 훌륭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할 수 없으며 벌써TV에서는 "열심히 일만한 당신, 이젠 일좀 그만하고 제발 좀 떠나라"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 시가 과연 얼마나 파워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2. 자바자바 셔츠.

골라 잡으랍니다. 잡아잡아~~ 골라잡아~~
정겨운 시장의 풍경이 초반부에서는 비추어집니다. 그런데 곧이어 독자의 수치심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아무놈이나", "악마구니처럼", "李씨의 가랑이 밑에 허리를 구부린다"
이 부분의 등장으로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이 풍경은 단순히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만을 상징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공익광고처럼 독자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고 또한 궁극적으로는 문명에 대한 거부나 혐오까지도 맞닥들이게 됩니다.
주관이 개입될 수 없는 사회, 객관적인 삶의 의지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통렬히 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는 존재 가능성을 획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들은 감정적인 비판에만 그칠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현실에 가까워짐은 현실을 가볍게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자는 의도라고 볼 때 오규원의 후기시 작업은 시의 형식에는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으나 시 자체가 가지는 힘에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인정하기 힘듭니다. 이 시도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와 역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시입니다. 계몽적 시는 시의 해석에도 한계가 있으며 그 시의 생명의 영속성은 국가, 또는 보편적 진리와 관련 되었을 경우에만 유효합니다. (ex: 한용운, 윤동주) 이러한 시는 마치 유행가와 같이 시와 당면했던 시대에는 정통한 내용을 담고 있겠지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그뿐, 새로운 재해석이 되지 않으며 시의 힘은 줄어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 시는 현재에 우리에게 많은 부분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매스컴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가치도 모르고 명품을 사재는 물질안에 갖힌 우리에게 말입니다.

참고문헌: 오규원 '현대시작법'
오규원(吳圭原)

본명 : 오규옥(吳圭沃)

1941년 경상남도 삼랑진 출생
1961년 부산사범학교 졸업, 그후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8년 『현대문학』에 <우계(雨季)의 시(詩)>,<몇 개의 현상(現像)>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2년 제27회 현대문학상 및 연암 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사랑의 기교』(1975),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1987), 『마음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1995)
시론집 : 『현실과 극기』(1976), 『언어와 삶』(1983), 『현대시작법』(1990)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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