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묻는 그대에게
-김남조 시인을 만나다-
이정희
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1953년 첫시집 「목숨」을 내신 이후 15권의 시집과 13권의 수필집을 내신 우리들의 어머니 시인인 김남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시와정신 3주년 기념식과 신인상 시상식을 축하하러 눈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불편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저는 기쁨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유명한 시인 중 한 분을 만난 것에 의미 두는 만남이 아니라 시를 깨닫고 삶을 사랑하게 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15권의 시집을 한 데 묶어낸 시전집 속에 마른 가지 같은 시심을 겨우내 묻고 살았습니다. 그 분에게 바쳐진 헌사는 이미 수많은 논문과 평론, 그리고 대담을 통해 익히 보아온 터였으므로 새삼 그에 덧붙일 언어도 마땅치 않을 뿐더러 저 같은 햇병아리 시인의 미숙한 작품론은 오히려 그 분에게 누가 될까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의 작품을 그저 가만히 곁에 두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시인의 길은 엄숙한 것입니다.”
시와 더불어(15시집)
나의 주님
때때로 제 골수에
얼음 용액을 따르시니
이 추위로
시 쓰나이다
사람은 길을 찾는
미혹의 한 생이오니
이 어설픔으로
시 쓰나이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 이르시나이까
사랑을 하되
필연 상처 입히는
허물과 회한으로
시 쓰나이다
날빛 같은 날에도
먹장 같은 날에도
아가들 태어남이 숙연하옵고
이것만은
늘 잠깨어 반짝이는
모든 아름다움에의 민감성
이 하나로 재주도 없이
한평생 시 쓰나이다
“사람의 길 중 한번 뿐인 선택을 시인의 길로 결정한 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시라는 것은 전인격적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이탈하며 시새움과 반격을 가합니다.”
15시집에 담겨 있는 이 시는 선생님의 오늘 말씀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한평생을 시인으로 옹골차게 살아오신 분의 선언은 제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인의 길로 들어서서도 늘 허둥대는 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골수에 얼음 용액을 따르시는 추위’로 시를 쓰신다는 노시인의 말씀이 송곳 되어 골수를 쪼갭니다.
“백지, 그것은 넘어야 할 확막한 사막입니다.”
바람 세례(12시집)
도시의 소음을
용케도 빠져 나와
숲에 당도한 바람
잎을 지운 나무들 옆에
한 둘레 바람 병풍
이루었어라
서걱서걱 얼면서
주룩주룩 흐르면서 하는
나무 속
새하얀 피의 펌프질을
눈감고 듣는 바람
그 밖의 일에선
손을 가른 바람
지상의 나이든 이들 중
맏형인 바람
맏형의 심정
그 한 주름을 머리꼭지서부터
서서히 쏟아 흘리리
바람 생수
바람 생수로
세례 받으리
“800여 편의 시를 썼지만 시는 쓴다기보다 구걸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편의 시라도 닮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작품이라도 그것은 모방이요 표절이며, 항상 비어 있는 상태에서 떠나보낸 상태에서 시를 써야 합니다.”
800여 편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그 많은 작품이 어떻게 서로 닮지 않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참 기이하게 여겨졌습니다. 선생님의 투철한 시인정신이 그지없이 부러웠습니다. 날선 칼로 매섭게 후려친 시편들이 입춘 무렵의 하늘에 쟁강거렸습니다.
“시는 가혹한 것입니다.”
목숨(첫시집)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 년 우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메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팔을 다친 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자연생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킹코브라뱀 이야기였는데 뱀의 알이 부화하는 70일 동안 어미가 지키고 앉아 있다가 손가락 크기로 새끼가 자랐을 때 그 어미는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 때가 어미의 공복기이고 새끼를 먹어치울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못 보고 아기가 엄마를 못보고. 시도 이처럼 가혹하고 가파른 것입니다.”
선생님은 얼마 전 팔을 다쳐 깁스를 한 상태에서 눈길을 헤치고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가혹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 같은 시, 엄마와 아기의 어긋난 만남이 우리의 삶일 터이지만 가파른 우리네 시일 터이지만 노시인의 단단한 눈빛이, 한없는 위로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당신의 형형한 눈빛이 생각났습니다.
“한 작품을 마지막 작품 같이 써야 합니다.”
정념의 기旗(4시집)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견디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이제금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따뜻한 가슴으로 정직하게 여백을 가지고 공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1년같이 하루를 살고 한 편의 작품을 마지막 작품같이 써야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마음은 바람에 끝없이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은 나직한 음성으로 변주되고 기도로 승화하는 모습이 시인의 한 평생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합니다. 당신도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오늘도 흔들리고 계신지요? 그러나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을 가진 벗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겠지요.
희망에게(근작시)
그대 원대로 하렴
왔는가 하는 참에 벌써 작별인사라니
그럼 그렇게 하렴
가는 길 잘 살펴가렴
바람 부는 세상
풍차 돌리다 돌리다
문득 편지 한 장 보내라도 준다면
치미는 어질머리의
고마움이고말고
피 같은 세월
물처럼 퍼 담아 쏟아버리고
그 언제 허깨비처럼 나타난다면
차마 아니 믿기어도
반갑고 말고 반갑고 말고
그도 저도 아니고
생의 끝날에야 찾아온다면
내 이르되 너무 늦은 건 아니라 하리
또 이르되
어서 다른 데 가보라 하리
나이듦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삶이 무거운데 나이가 들면 얼마나 더 무거울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노시인의 인식은 겸손하고도 온화합니다. 왔는지 모르게 슬며시 가는 희망에게 잘 가라 하고 생의 끝날에 희망이 찾아와도 감사하며 오히려 다른 곳에 가보라 하겠다고 합니다. 따스한 어머니의 품이 느껴집니다. 온 세상을 살리는 대지의 기운이 땅 속으로부터 탱탱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당신, 생의 끝날에 희망이 찾아와도 너무 늦은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생애가 황송한 축복입니다.”
주 앞에(5시집)
참으로 생명이라 이름하는 건
아무 것도 버리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생명이라 이름하는 건
한 가지 빛 둘레 안에 보듬어 주십니까
비수로 도려낸 아픈 매듭일래
그 울림 천지에 울리는 옥피리 소리
미움도 불길 같고 사랑과 죄와 뉘우침도
푸슥푸슥 타오르는 번뇌의 불더미
한평생
한 세상을 사는
수없는 상처 살펴 주십니까
한평생 한 소망에 거는
인내와 분발 보아주십니까
커다란 소리로 가르쳐 주심보다
아무 말씀 없이 늘 함께 계셔 주십시오
단번에 눈이 밝는 큰 슬기의 은혜보다
주의 이끄심을 꼭 믿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생명이라 이름하는 건
청량한 바람결에 함께 두시옵고
영원토록 사랑해 주십니까
“젊은 시절, 나는 비관론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삶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 정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한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삶을 사랑하게 된다니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제게 있어 삶은 늘 부레옥잠 같이 정처 없었고 바지랑대에 매달린 잠자리의 날개처럼 위태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시편 중 신의 사랑을 노래한 많은 시는 제게 그대로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끝없는 물음표를 올리는 손끝에는 감사의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수없이 마음을 닦고 닦아야 비로소 열리는 이슬입니다. 당신의 영혼도 이 시편으로 하여 맑게 씻길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 어머니로 시인으로 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느꼈던, 수많은 환희과 고뇌를 한 하늘 밑에 살아가는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만났습니다. 허방을 짚던 발걸음이 이 땅에 다시 든든히 서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당신도 선생님의 발자취를 다시 곰곰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속죄의 등불을 켜고”
시에게 잘못함
시가 안 쓰이는 한 철
벼랑에 세워져 사납게 흔들리는
기이한 공포․․․․․․ 이런 때
우리는 어떤 예배를 올릴 것인가
어느 날 시가 쓰여진다
혈액처럼 고여오는,
아니 혈액 자체인 그것을
원고지 위에 공손히 옮긴다
한데 야릇한 가책과 의문이 섞여 치받는다
더 오래 절망에 잠겼어야
옳았지 않을까
여러 세대에 걸치는
소수의 진정한 독자
저들의 가슴을 관통하기엔
참담할 만치 화살이 허약한 게 아닌지
시적 진실성의 함량미달로
친구인 시인들에게
환멸을 끼치지 않겠는지
시인이여
우리는 시에게 잘못하는 일이 많다
하면 오늘밤 각자의 시 앞에
속죄의 등불을 켜고
새벽녘까지
천 년 같은 긴 밤을
시의 참 배필로 있자
끝으로 당신과 내게 당부하는 선생님의 자분자분한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시에게 잘못을 하고 사는 걸까요. 봄의 길목에 자욱자욱 눈물납니다.
* 출처 : 시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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